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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송천
ㆍ작성일 2026-07-16 (목)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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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번월봉공月峯公 정악鄭岳 문중門中의 가훈家訓
                           01번   월봉공月峯公 정악鄭岳 문중門中의 가훈家訓
                                                                                                   송천松泉 김영동金永東
○ 연일정씨延日鄭氏 유래由來
 연일정씨는 신라新羅의 전신前身인 사로국斯盧國의 육부촌六部村 중 취산진지부嘴山診支部 촌장村長 지백호智伯虎가 서기 32년(유리이사금 9) 봄 유리왕儒理王으로부터 다른 다섯 촌장 村長과 함께 사성賜姓받을 때 본피부本彼部로 개칭되면서 정鄭씨의 성姓을 하사받은 것이 시초가 되며, 그의 원손遠孫 정종은鄭宗殷이 신라 조新羅朝에서 간관諫官으로 직언하다가 인동仁同 약목 현若木縣에 유배된 후 후손 정의경鄭宜卿이 영일迎日로 이거하여 호장을 지내고 영일현백迎日縣伯에 봉해졌으므로 영일정씨迎日鄭氏로 시적始籍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의 계대系代가 실전되고 소목昭穆1) 을 고증할 문헌文獻이 전하지 않아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와 감무공파監務公派로 갈라져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신라 때 간관諫官 정종은鄭宗殷을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그 후손인 정습명鄭襲明2) 을 1세도 世祖로 하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와 정극유鄭克儒를 1세조世祖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가 있다. 정습명鄭襲明은 고려高麗 의종毅宗때의 중신重臣으로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냈으며, 그의 선대先代 정의경鄭宜卿이 영일 호장迎日戶長을 지냈고, 다시 연일 현백延日縣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연일延日로 하였는데, 연일延日의 옛 지명인 영일迎日로도 쓰고, 오천烏川으로 부르기도 한다. 정습명鄭襲明을 1세조로 하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는 정몽주鄭夢周·정문예鄭文裔계로 나뉘었고, 고려 때 감무監務를 지낸 정극유鄭克儒를 1세조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는 정사도鄭思道·정철鄭澈계로 분리되었다. 이외 고려 때 정자피鄭子皮를 1세조로 하는 양숙공파良肅公派가 있다. 포은공파는 시조 형양공滎陽公 정습명鄭襲明으로부터 제2세 섭균燮均 제3세 겸목謙牧 제4세 인신麟信 제5세 지태之泰 제6세 종흥宗興 제 7세 림林 제8세 인수仁壽 제9세 유裕 제10세 운관云瓘 제11세 포은공 몽주夢周이다. 13世 설곡공 정보鄭保의 아들 삼 형제 중 첫째 윤정允貞은 용인 능곡陵谷의 포은묘하圃隱墓下에 거居하고, 둘째 윤화允和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조졸早卒, 셋째 윤관允寬은 부공父公의 유배시 배종陪從하고 단성丹城에 거居하다가 예천군 효명면 포본리로 이거하고, 후손 응락應樂 덕재공德齋公은 의성군 다인면 덕지리로 시거始居, 후손 용화龍華 남산공南州公의 아들 삼형제(지석之碩, 지수之壽, 지성之成)중 3子(지성之成)의 후손들이 단밀․단북으로 이거하여 세전世傳하고 있다.
○ 연일정씨 지주사공파 주요 인물  
충신, 효자, 의인義人으로 일컬어지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는 나면서부터 어깨에 북두칠성처럼 검은 점 7개가 박혀있어 이웃 사람들이 모두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고 한다. 9세 때 집에서 부리는 여종이 군에 나간 남편에게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그 자리서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고 달은 찼다. 이지러지지만, 첩의 마음은 항시 변치 않습니다."라고 써주었다. 짧은 한시로 남편을 그리는 아내의 마음을 표현한 소년의 재능에 글방 스승도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는 24세에 과거에 급제, 56세로 일생을 마칠 때까지 기우는 민생을 구하는 일에 열과 성을 쏟았다. 그밖에 선조 때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킨 정대임鄭大任3) , 현종 때의 우의정을 지낸 정유성鄭維成4) 과 그의 손자인 양명학의 거성 정제두鄭齊斗5) , 효종 때 학자 정극후鄭克後6) , 고종 때 산수화에 능했던 정문승鄭文升7) 등이 있다.


○ 초산공 정전섬 鄭全暹과 월봉공 정악 鄭岳의 효행
초산공櫵山公 정전섬鄭全暹은 천부적인 성품으로 그 모친을 받들어 모시기를 의복은 가볍고 따뜻하게 음식은 어머님의 식성食性을 맞추어 달고 맛 나도록해서 올리고,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정이 넘치는 얼굴빛을 하며 그 어머님의 뜻을 순하게 받들어서 어기지 않으니, 원근에 사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말하기를 “부모를 섬기는 데 있어서 마땅히 정 전섬과 같이 행한 연후에야 가히 자식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라.” 하였다.
아들 효자 월봉공月峯公 정악鄭岳(1779 ~ ?)은 부친께서 하세下世하실 때 임종 시(12살 때)에는 단지斷指해서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얼마 동안을 소생하셨다가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고 상기喪期를 마치고 복服을 벗을 때까지 조금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도록 정성을 다하셨다. 그리고 조모님 섬김에 있어서도 그 부친 유언대로 하여 가정은 비록 청빈하였으나 온 정성을 다해서 삼십여 년을 하루 같이 받들어서 백수百壽를 누리게 하였고 돌아가시자 여묘살이(3년간)하면서 그 슬프고 애통한 정을 다 하였으니 그 효행이 높고 특수한 가치가 실로 고금에 드문 일이라 이것이 발천發闡이 되어서 나랏님으로 부터 그 고리故里에는 정려문旌閭門(효자비에는 “사세오효비四世五孝碑”라고 적혀 있다. 그 부친에게는 통훈대부通訓大父 호조좌랑戶曹佐郞의 증직이 내려졌고, 월봉에게는 효자천孝子薦으로 1867년 조봉대부朝奉大夫 지부좌랑地部佐郞(호조좌랑의 별칭)의 제서除書8) 를 내렸다. 그리고 낙파洛坡 류후조柳厚祚9)가 전기를 짓고, 도정都正 성재평成在平10) 이 실록을 썼다. 1981년 4월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주선2리에 숭효각을 세웠다.
○ 월봉공月峯公 문중門中의 가훈家訓
1 효우근천孝友根天 :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함은 인간 만사에 천연적天然的으로 근본이 되며.
2 부부유별夫婦有別 : 부부간에는 특별한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있느니라.
3 봉제지성奉祭至誠 : 봉제사奉祭祀 범절凡節에 있어서는 자손된 도리로서 지극한 정성이 있어야 하고,
4 접빈환대接賓歡待 : 접빈객 관념觀念에 있어서는 주인으로서 환영하고  대접하는 도리를 다하라.

5 학업정진學業精進 : 학업을 닦음에 있어서는 정밀하고 부지런하게 연마                         하고 궁구해서 자신이 전공한 계통으로 발전
6 적재이직適材以職 : 재질에 맞는 직업을 취해야 하고,
7 정직유본正直有本 : 올바르고 곧게 먹줄을 친 것처럼 직선으로 정진함을 기본基本으로 삼아
8 신명보중身名保重 : 자신의 일신과 사회에 이바지한 명예를 소중하게 보전하도록 하라.
9 언어충신言語忠信 : 자기 입으로 나오는 말은 남들에게 충성스럽고 믿음성 있게 하고
10 행실독경行實篤敬 : 행하는 행동거지는 언제나 남들이 보는데 돈독하고 존경하게 하라.
11 근검항양勤儉恒養 : 몸은 항상 부지런하고 검소하도록 수양해서
12 처사정상處事精詳 : 처리하는데 있어서는 언제나 정미精微롭고 상세하게 정확해야 하며
13 징분질욕懲忿窒慾 : 분해서 노함을 언제나 징계하고 사리사욕을 막아야
14 천선개과遷善改過 : 착한 길을 어제나 숭상해서 잘못된 허물을 두 번 다시 범하지 않도록 하고
15 은혜물망恩惠勿忘 : 남에게 입은 은혜로운 일은 잊지를 말고
16 수원막결讐怨莫結 : 그 누구하고도 원수를 맺지 않도록 명심하고
17 심무망염心無妄念 : 마음속에는 망년된 생각이 나지 않도록 하며
18 자정기도自靖其道 : 자신이 가는 길은 항상 고요하고 평안히 있게 하라.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51380a67.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497pixel, 세로 883pixel
                                                  <월봉공 문중 가훈>
○ 전설과 설화
1) 정습명鄭襲明 묘에 대한 전설
지주사공파 파조 정습명은, 고려조 의종의 태자적 스승, 즉 국사國師로 태자의 교육과 인종조 폐위 논란에서 태자를 지켰던 충신이다. 현재 경상북도 포항시 대송면 남성리에 정습명(鄭襲明)을 제향 하는 남성 재와 신도비가 음성 터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 구 연일 현청이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옛날 현청에 새로 부임하는 현감마다 원인도 모르게 죽는 일이 있었는데 아무도 현감으로 부임하려는 사람이 없게 되자, 이 소문을 들은 담력이 좋은 한 선비가 자청하여 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임 첫날, 두려움 중에 밤을 새우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이 나타나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내가 누운 자리에 무엄하게 현청을 지었으니, 빨리 옮겨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현감이 엉겁결에 대답하였다. “정확한 묏자리가 어디입니까? 알려주시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내일 새벽 일찍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서 맨 처음 앉는 자리가 바로 그 자리니라.”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리고 느닷없는 까치 소리에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까치가 날아와 있었다. 훗날 마을의 촌로들에게 까치가 날아와 앉은 자리를 수소문한 결과 현청 부지가 정습명의 묘역임을 알게 되었다. 현감은 서둘러 현청을 고읍리로 옮겼다고 전한다.
2) 포은圃隱 선생先生 설화說話
손칠휴孫七休가 경상도 안찰사로 있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가 지역을 순시하는 도중 영천군의 경계를 막 넘어가려고 하였을 때 몹시 졸려 견딜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말에서 내려 잠시 잠을 청했다. 그러자 꿈에 눈과 같이 핀 수염을 흩날리면서 웬 노인이 나타나 "나는 포은이다. 그런데 내가 있는 곳이 몹시 퇴락하여 비도 새고 바람도 세차게 들어와서 몹시 괴롭다."라고 하면서 마치 부탁하는 것과 같은 말씨였다. 칠휴는 깜짝 놀라 일어나 그 지역의 노인들에게 물어보니 그곳에 사당의 흔적이 있었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고을의 수령에게 명하여 사당을 짓게 하였으며 완공 후 칠휴가 스스로 자신이 그곳에 가서 제전(祭奠)을 지냈으며 글을 지어 사당의 벽에 붙여 이러한 사실을 알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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