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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송천
ㆍ작성일 2026-10-03 (토)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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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 ●연일(延日)鄭氏 영일(迎日)鄭氏 오천(烏川)鄭氏 의 시조(始祖)
5번  ●연일(延日)鄭氏 영일(迎日)鄭氏 오천(烏川)鄭氏 의 시조(始祖) 지백호(智伯虎)♣
                                                                                                              따온 글  松泉 金永東
시조의 이름은 지백호로 처음 진한 땅 자산 진지촌에 강림하시니 재목됨이 무리에 뛰어 나고 덕이 모든 사람의 으뜸이 되여 진지촌의 장이되었다. 지백호 (智伯虎)는 경주 정씨 및 그를 필두로 한 대한민국 모든 정씨(鄭氏) 가문의 도 시조. 진한 12국 가운데 하나인 ★사로국 화산에 내려와 사로 6촌 중 하나인 ★취산 진지촌(觜山 珍支村)의 촌장이 된 인물이다.  ▶기원 : 신라 6촌이름은 ①알천 양산촌 (閼川楊山村)돌산 ②고허촌 (突山高墟村) ③취산 진지촌 (觜山珍支村) ④무산 대수촌 (茂山大樹村) ⑤금산 가리촌 (金山加利村) ⑥명활산 고야촌 (明活山高耶村)이며 신라 6촌에서 유래한 6부 성씨(이, 최, 정, 손, 배, 설 ) 이에 앞서 조선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는데, ◆『삼국사기』신라본기 제1 '시조 혁거세 거서간'조 에 9년(32년) 봄에 6부(六部)의 이름을 바꾸고, 성씨(姓氏)를 사여하였다. … 고허부(高墟部)는 사량부(沙梁部)라고 하고 성은 최(崔)로 하였다. … 간진부(干珍部)는 ★본피부(本彼部)라고 하고 성은 정(鄭)으로 하였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제1 '유리 이사금'조 에 진한 땅에는 옛날에 여섯 촌이 있었다. … 넷째는 취산 진지촌이다. 촌장은 지백호로 처음에 화산에 내려왔으니 이가 본피부 최씨의 조상이 되겠다. 지금은 통선부라 한다. ★시파 등 동남촌이 여기에 소속된다. 최치원은 바로 본피보 사람이다. 지금은 황룡사 남쪽 미탄사 남쪽에 옛 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최후(崔候)의 옛 집임이 분명하다. ◆『삼국유사』권1 기이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 에 삼국유사에는 나머지 촌장들처럼 화산에 강림했다는 적강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며, 삼국사기에는 고조선의 유민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삼국유사는 일연 개인이 쓴 사서이며 불교적 색채를 띤 것을 비롯한 다양한 설화가 담겨 있으며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고려 조정 아래에서 엄격한 문체와 체계에 따라 공식적으로 편찬한 정사임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물론 고고학적으로 사로국의 기원은 고조선 유민들이 경주와 울산의 토착 세력과 힘을 합쳐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술 차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각각 정씨와 최씨 시조가 엇갈려 기술되어 있으나, 두 집안 모두에서 정씨는 지백호, 최씨는 소벌도리로 여기는 것에 이견이 없으므로 기존 통설에 따라 지백호를 정씨의 시조로 생각된다. 또한 고고학적 증거와 학계의 진한 6촌에 관한 연구에 의해서도 고증되는 바이다. 아래에 서술한 것과 같이 최근에는 박, 석, 김 삼성이 각각 6부 중 세 군데에 근거하였다고 추측하고 있는데 그중 본피부는 하필이면 신라 초기 이후로 완전히 도태되는 석씨의 근거지였다. 이씨의 급량부는 말할 필요도 없이 궁성 등이 위치한 명실상부 서라벌의 중심이자 현대 경주 시내이며 최씨의 사량부(고허촌)는 남천 이남으로써 남산으로 대표되는 훌륭한 종교, 문화적 우위와 좋은 주거환경을 가진 곳으로 경주 시에서도 읍면 지역 가운데 가장 먼저 월성군에서 경주시로 이관된 지역인 탑동, 배동, 율동이 속한다. 하지만 본피부는 비옥한 내동, 외동 지역 땅을 차지해놓고 입지적으로도 중요한 교통로에 자리하였으나 저러한 이유로 6부소감전이 설치됐을 때도 관리의 관등이 앞의 두 지역보다 낮았다. 실제로 최씨는 조선시대까지도 경주의 향리를 계속 세습하며 흥하였는데 경주 정씨는 경주 내에서 큰위세를 떨치지 못하였던 걸 생각해 보면 지백호의 진지촌에서 석씨와 손을 잡은 건 최씨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 수 있다.
▶생애는 취산 진지촌에서 고조선 유민의 일파를 이끌던 지백호는 기원전 69년 3월 1일(음), 알평, 소벌도리, 구례마, 지타, 호진의 다른 6부촌장과 함께 각각의 자제들을 이끌고 알천 기슭에 모여 덕이 있는 사람을 군왕으로 삼아 나라를 세워 도읍을 정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때 양산(楊山, 현재 탑동 부근 남산 자락) 아래 나정 곁에서 나는 말 울음소리를 듣고 혁거세를 얻었으며, 기원전 57년 혁거세를 거서간으로 추대하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였다. 신라 제3대 유리왕은 32년(유리왕 9) 사로6촌을 6부로 개편하였는데, 이때 진지촌은 본피부(本彼部)로 바뀌고 정씨(鄭氏) 성을 하사받았다. 이로부터 오늘날 정씨는 중국에서 도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백호를 도시조(都始祖)로 한다. ▶적강지와 묘소는 6부촌장 가운데 유일하게 적강지와 묘소가 모두 전해진다. 적강지는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동, 묘소는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의 백운대 산록에 위치하고 있다.
▶감문왕릉 백운재(白雲齋)는 오래전 건립된 것으로 전해지나 오랜 시간 비바람을 맞고 퇴락이 심하여 1984년에 중건하였다. 1987년 11월에 시조 묘역 및 열위조 기적비, 세계비를 세우고 1988년 10월 신도비를 세웠으며, 1990년 11월에 홍살문, 안내도, 문정공(휘진 후)의 묘단비를 세워 성역화를 마무리했다. 그 외에도 1971년에 나정 근방의 양산재 입덕묘(立德廟)의 제3위차 육촌 장에 열향(列享)되기도 했다.
▶기타 : 자(字)는 인세(仁世), 시호(諡號)는 문화(文和), 휘(諱)는 낙랑후(樂浪侯) 지백호(智伯虎), 추봉(追封) 감문왕(甘文王). 삼한시대(三韓時代) 진한(辰韓) 사로(斯盧) 6촌장(六村長)의 하나인 진지부촌장(珍支部村長)으로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왕(王)으로 추대(推戴)하고, 신라(新羅) 건국(建國)에 큰 공(功)을 세웠다. 그 공(功)으로 개국(開國)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다. 공(公)의 호양지의(互讓至義)는 신라건국(新羅建國)의 모체(母體)가 되었고, 왕도(王道)를 토착(土着)시켰으며, 한 나라의 역사(歷史)를 창조(創造)한 원훈(元勳)으로서 백성을 예(禮)로 가르치고 부족(部族)의 연맹(聯盟)을 이루었으며, 백성(百姓)들이 그 덕화(德化)를 입어 윤리(倫理)가 바로 섰고, 그 넓은 금도(襟度)와 위덕(威德)은 신라(新羅)의 국풍(國風)으로 이어 주었다. 서기(西紀) 32년(유리왕 9)에 진지부(珍支部)가 본피부(本彼部)로 승격(昇格) 개칭(改稱)하고, 낙랑후(樂浪侯)에 봉(封)해지면서 정씨(鄭氏)라는 성(性)을 하사(下賜) 받았다. 서기(西紀) 516년(법흥왕 3)에 문화(文和)로 시호(諡號)되었고, 서기(西紀) 658년(무열왕 3)에 감문왕(甘文王)에 추봉(追封)되었다. 음력(陰曆) 10월 10일 후손(後孫)이 향사(享祀)하고 있다.
<주>
★사로국(斯盧國)의 초기 건국 설화와 관련된 화산(花山)은 경주 지역에 있던 사로육촌(서벌육촌) 중 자산(子山, 혹은 취산 觜山)의 진지촌(珍支村)과 연관되는 지명 또는 경주 지역의 산을 의미한다
★취산 진지촌(觜山 珍支村)은 신라 건국 이전 진한(辰韓) 지역에 존재했던 사로 6촌(六村) 중 세 번째 마을이다.
★본피부(本彼部)는 삼국시대 진한(辰韓)의 사로국이자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경주)을 구성하던 신라 육부(六部) 중 하나이다. 원래는 진한의 6촌 중 하나인 취산 진지촌(觜山珍支村)이었으나, 서기 32년(유리왕 9년)에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본피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피부<斯彼部>
성씨 (삼국사기)    이<李>    최<崔>    정<鄭>    손<孫>    배<裵>    설<薛>
성씨 (삼국유사)    이<李>    정<鄭>    최<崔>    손<孫>    배<裵>    설<薛>
▶촌장 ①알평<謁平> ②소벌도리<蘇伐都利> ③지백호<智伯虎> ④구례마<俱禮馬> ⑤지타<祗沱>⑥호진<虎珍>
★감문왕릉(금효왕릉)과 백운재(백운산)는 경상북도 김천시 일대에 터를 잡았던 고대 소국 감문국(甘文國)의 역사와 애절한 전설이 깃든 장소들이다 감문왕릉 (금효왕릉 金孝王陵)의 위치는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삼성리(오성마을) 930번지 일대 • 특징은 김천 지역에 남아있는 가장 큰 고분(봉분 높이 6m, 지름 15m)으로, 옛 기록에 감문국 왕의 무덤인 ‘김효왕릉’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과거 주민들 사이에서는 큰 무덤이라는 뜻의 ‘말무덤’으로도 불렸다. 일제강점기 시절 도굴을 당하고 오랜 세월 경작지로 개간되면서 훼손이 심해 현재는 다소 쓸쓸한 모습을 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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