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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송천
ㆍ작성일 2026-08-09 (일)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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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선생의 흔적(痕跡)을 찾아서♣
                            4번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선생의 흔적(痕跡)을 찾아서♣
                                                                                                                松泉 金永東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고려 말기의 충신으로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영일(迎日), 관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고려 우왕高麗 禑王 3년(1377년) 9월에 일본(규슈 하카타)에 사신使臣 으로 파견되어 약 10개월 동안 머물렀고, ★왜구倭寇 금지 약속과 포로 송환 성과를 거두어 우왕 4년(1378년) 7월에 귀국(환조)했다. 그가 일본에 머물며 남긴 시 ★(현존 13수)들은 대부분 체류 기간 중인 1378년 봄철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안동 영호루 회자 일본 작(安東 映湖樓回自日本作)
일본서 돌아와 안동 영호루에서 /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열편동남군현다(閱遍東南郡縣多)   동남으로 여러 고을 두루 다녀 보았지만
영가형승각우가(映嘉形勝覺尤加)   영가(안동)의 경치가 제일 아름다워라.
읍거최득산천세(邑居最得山川勢)   고을이 산천 형세 가장 좋은 곳에 있어
인물분연장상가(人物紛然將相家)   인물도 많아라, 장상가가 분분하네.
장포세공요숙속(場圃歲功饒菽粟)   논밭에 풍년 들어 곡식들은 넉넉하고
루대춘몽요앵화(樓臺春夢繞鸎花)   누대의 봄날엔 꾀꼬리와 꽃이 있네.
직수명정종금석(直須酩酊終今夕)   모름지기 오늘 밤이 다 새도록 취하리
만리초회해상착(萬里初回海上槎)   만리 길을 처음으로 배를 타고 왔잖은가.
오래전부터 안동의 영호루(映湖樓)는 경남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전북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함께 한수(漢水) 이남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불리어져 왔다. 창건에 관한 문헌이 없어, 언제 누구에 의하여 건립되었는지 잘 알 수는 없으나 천여 년 동안 그 이름이 전통의 웅부안동(雄府安東)과 함께 하고 있다.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恭愍王) 10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서 왕이 이 곳 복주(福州)로 백관을 거느리고 피난하였다고 한다. 왕은 피난중의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자주 남문밖에 우뚝 서 있는 영호루를 찾았고, 때로는 누각 밑 강물에 배를 띄우기도 하였으며, 사장에서 활쏘기경기도 하였다고 한다. 난리가 평정되어 환궁한 왕은 복주를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영호루를 잊지 못하여 친필로 한 映湖樓 3자가 쓰인 금자현판(金子懸板)을 보내어 누각에 달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조선중기 명종(明宗) 2년 (1547년)의 대수(大水)로 누각은 유실(流失)되었으나 현판만은 김해(金海)까지 떠내려가서 발견되어 6년 후인 1552년에 안동부사(安東府使) 안한준(安漢俊)이 중창(重創)하였으며, 영조(英祖) 51년(1775년)에 다시 홍수로 유실되어 부사 신맹빈(申孟彬)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이처럼 홍수로 인하여 2차례 중건된 영호루는 정조(正租) 15년(1792년)의 홍수 때 또 유실되어 4년 뒤에 부사 이집두(李集斗)가 중건하여 100여 년 동안 안동의 관문으로서 그 위용을 갖추었으나 갑술년(甲戌年) 대수(大水)는 면할 수가 없었다. 안동대구간의 도로를 연결하는 안동 교 공사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누 위에서 휴식하는 사이 갑자기 물이 닥쳐 많은 사람과 함께 떠내려갔다고 한다. 다음날 구담(九潭)부근에서 사람들은 무사히 구했으나 누각은 유실되고 「금자현판」만은 수개월 후 선산군(善山郡) 구미리(龜尾里) 부근의 강물 속에서 다시 찾았다고 한다. 이처럼 파란을 겪은 영호루가 사라지고 강가에 빈터만이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다. 이에 전통과 옛 문화를 숭상하고 향토애(鄕土愛) 짙은 안동시군민이 1969년 12월 「영호루 중건 추진 위원회」를 조직 하였고, 드디어 안동시가지 남편 강 언덕인 정하동(亭下洞)342-5(경상북도 안동시 서동문로 207(동부동)에 1,085평의 대지를 확보하고, 1970년 11월에 역사적인 영호루의 중건을 보게 되었다. 노송(老松)과 잡목이 우거진 언덕에 북향으로 자리한 새 영호루에 올라보면 멀리 북서쪽으로 선비의 영봉 ★학가산(鶴駕山)이 우람하게 솟아있고 강 건너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더욱이 시가지를 에워싼 ★영남산(映南山) 줄기는 철따라 색깔이 변하니, 여름의 신록, 가을의 단풍은 온통 시가의 모습을 다르게 한다. 일찍이 우탁(禹倬), 정도전(鄭道傳),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김종직(金宗直), 이황(李滉) 등 당대의 대표적 문인이 영호루의 경관을 칭송 했거늘, 다시 복원된 이 곳 누각에 올라, 눈 아래 비단을 펼친 듯한 대하(大河)와 경관을 바라보면, 그 누가 속세(俗世)의 시름을 잊지 않으리. 순조 20년(1820년) 안동부사 김학순이 영호루를 중수하고 114년째 되던 1934년 때 일이다. 여름 장마가 시작한 무렵인 7월 23일 낙동강 대홍수가 안동읍내 전체를 휩쓸게 된다. 이때 영호루는 완전히 휩쓸려 떠내려가고 빈터에는 주춧돌과 돌기둥 몇 개만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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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남고산성 내 만경대 바위에는 고려 말 포은 정몽주가 1380년(우왕 6년) ★황산대첩에서 승리한 이성계를 축하하는 연회 도중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지어 바위에 새긴(암각) 우국시가 남아 있다.  ★남고산성의 만경대(萬景臺)에는 정몽주가 지은 시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남고산성의 만경대(萬景臺)라는 곳에 있다.1380년 정몽주는 이성계와 함께 남원의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개경으로 돌아가던 중 전주를 지나다 이성계가 승전 기념 잔치를 벌였다. 이성계가 조선 건국에 뜻이 있음을 드러내는 노래를 부르자 정몽주가 만경대에 올라 고려를 걱정하는 시를 읊었는데 이것이 후에 만경대 바위에 새겨지게 된 것이다.  남고산성은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했을 때 세운 산성으로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 라고 불리는 봉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만경대에 오르면 그 명칭처럼 ‘만 가지의 경치’가 보인다. 전주 시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데 한옥마을보다는 전주시 완산구 칠봉 방향이 잘 조망된다.  이곳 만경대의 한 바위에는 ‘★만경대(萬景臺)’라는 글씨와 정몽주가 남겼다는 시가 새겨져 있다. 고려 말 정몽주는 이성계와 함께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의 황산에서 왜구와 싸워 크게 이겼다. 전쟁이 끝나고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주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때 만경대에 올라 자신의 심회를 시로 읊은 것이다. 1380년 정몽주는 이성계와 함께 남원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들은 개경으로 돌아가던 도중 전주를 지나가게 되었다. 이성계는 선조들이 살았던 이목대 마을에 들러 친척들을 초대하여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잔치를 벌였다. 이목대는 전주 이씨의 시조가 살아왔던 곳으로 이성계의 4대조인 이안사가 출생한 곳이다. 이때 이성계가 잔치에서 ‘★대풍가’라는 노래를 불렀다. 대풍가는 중국 한나라 태조 유방이 자신의 고향인 패군 풍현에서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잔치를 열고 부른 노래이다. 이성계가 대풍가를 부른 것은 자신의 고향 전주에 들러 조선을 건국할 것임을 밝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정몽주는 고려의 상황을 걱정하고 시국을 한탄하며 만경대에 올라 복잡한 심경을 시로 짓게 된 것이다. 바위에 새겨진 시는 정몽주의 문집인 『포은집』 제2권에 ‘등전주망경대登全州望景臺(전주 망경대에 오르다)’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몽주시가 새겨진 전북 전주 망경대 바위 (만경대 암각 시)
千仞岡頭石徑橫(천인강두석경횡) 천 길 높은 산마루에 돌길 비껴 있는데
登臨使我不勝情(등림사아불승정) 올라서자 내 심정 견딜 수 없게 하네.
靑山隱約扶餘國(청산은약부여국) 푸른 산 아스라한 곳이 부여국이요
黃葉繽紛百濟城(황엽빈분백제성) 누른 잎 흩날리는 곳이 백제성이라
九月高風愁客子(구월고풍수객자) 구월의 고풍이 나그네를 시름케 하고
百年豪氣誤書生(백년호기오서생) 백년의 호기가 서생을 잘못되게 했네.
天涯日沒浮雲合(천애일몰부운합) 하늘가엔 해가 지고 뜬구름만 모이니
惆悵無由望玉京(추창무유망옥경) 서글 퍼라 서울을 바라볼 길 없어졌네.
이 시는 1742년 진장 김의수가 새긴 것으로 전해진다. 격변의 상황 속에서 정몽주의 고려에 대한 근심과 걱정, 충성스러운 마음이 잘 녹아있는 시다. 만경대에 올라 복잡 미묘한 감정을 토해내며 쓸쓸하고도 서글픈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바위는 2009년 10월 30일 전주시 향토문화유산 제1호에 지정되었다. <끝>
<주>
★왜구倭寇 금지 약속 : 우왕 대의 정몽주 외교 (1377년): 정몽주가 일본 규슈의 지방관인 이마가와 료순(今川了俊)을 찾아가 왜구 금압을 요구했다. 정몽주는 빼어난 외교술로 협조를 얻어내어 왜구 금지 약속과 함께 붙잡혀갔던 고려인 수백 명을 송환받는 성과를 올렸다
★정몽주의’현존 13수 중 : 〈단심가〉, <백로가(白鷺歌)> / 권계가(勸戒歌) - 정몽주의 어머니 (영천이씨) 시(詩) /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울세라,/ 청강에 좋이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
★영가지(永嘉誌)는 조선 시대 안동(영가)의 역사, 지리, 인물 등을 기록한 8권 4책의 대표적인 읍지(향토지)이다. 1602년(선조 35)에 학자 권기(權紀)가 스승 류성룡(柳成龍)의 뜻을 받들어 만들기 시작해 1608년에 완성했다. 공식 관찬이 아닌 개인 초고본 형태로 전해졌으며, 안동 지역의 옛 지명과 문화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경상북도 학가산(鶴駕山)은 안동시(북후면·서후면)와 예천군(보문면) 경계에 솟은 해발 870~882m의 산이다. 학이 수레를 타고 날아가는 형상에서 이름이 유래했으며,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영남 북부 지역의 뛰어난 조망처로 꼽힌다
★영남산(映南山)은 경상북도 안동시 시가지 북동쪽에 위치한 해발 246.6m의 산으로, 수백 년 동안 안동을 지켜온 안동의 주산(主山)이자 진산(鎭山)입니다
★만경대(萬景臺)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남고산성길 33-31 (만경대 남쪽 바위)
★황산대첩(荒山大捷)은 고려 우왕 6년(1380년) 고려를 침입한 왜구(이른바 '경신년 왜구')를 9월 고려의 무장인 이성계가 황산(荒山,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근방)에서 격파한 전투이다.
★전주 남고산성은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의 고덕산 정상부에서 중복에 걸쳐 삼태기식으로 축조된 석성이다. 산성의 축성 연대는 기록에 없다 전주 남고산성(全州 南固山城)은 대한민국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에 있는 백제의 성곽이다. 1981년 12월 1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94호로 지정되었다
★대풍가 : 이성계는 1380년(우왕 6년) 남원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뒤, 고향인 전주 오목대에서 종친들과 잔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부른 대풍가를 읊으며 천하를 향한 호탕한 기개와 웅대한 포부를 드러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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