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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송천
ㆍ작성일 2026-07-27 (월)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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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 ● 정몽주의 후손들♣
                                                      2번 ● 정몽주의 후손들♣
                                                                                                                    松泉 金永東
정몽주 이름은 정몽란(鄭夢蘭) 어머니가 난초화분을 안는 태몽을 꾸어 태어났다.  두 번 째 이름은 9세 때 베를 짜다 졸게 된 어머니,  이때 마당에 있는 배나무 위에 용이 웃고 있는 꿈을 꾼 뒤 놀라서 배나무를 처다 본다. 그러자 아들이 배나무위에서 용처럼 웃으며 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이름을 정몽룡(鄭夢龍)으로 바꾼다.  세 번 째 이름은 18세 때 꿈을 꾼 아버지  꿈에 주공(周公=주무왕의 동생)이 나타나 아들을 가리키며 "후세에까지 명성을 빛나게 할 아이이니 잘 키우라" 했다. 그래서 주공의 주(周)자를 따 지은 이름이 정몽주(鄭夢周)로 고친다.  다음은 정사도(鄭思道) 정보(鄭保)가 있다.  정사도는 고려 말 문신이다 1336년 (충숙왕 복위 4년)문과에 급제한다. 30세에 국자감시(國子監試) 주관하고 문하부(文下府)와 밀직사(密直司) 의 관직을 두루 역임한다. 성품이 강직하여 간언(諫言)을 서슴치 않았는데 신돈이 최영을 죽이고자 계략을 꾸밀 때 이를 저지하다 파면된다.  공민왕때 동북면상원수, 도순문사에 임명되고 일성군(日城君)에 봉군된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정보는 조선 전기의 인물로 정몽주의 손자이다.  학문이 뛰어나 세종의 총애를 받고 예안현감과 사헌부 감찰을 역임했다. 1456년(세조2년) 단종 복위 사건이 일어 난후 사육신의 무죄를 주장하다 극형이 내려진다. 정몽주의 손자임을 고려하여 단성(丹城) 으로 유배된다.
★정사도(鄭思道) / 고려 후기에, 밀직제학, 첨서밀직, 지밀직사사 등을 역임한 문신.
어릴 때 이름은 정양필(鄭良弼)이며, 자는 사도(思道)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정사도(鄭思度)라 하였다가 공민왕 때 다시 정사도(鄭思道)로 고쳤다. 연일(延日: 경상북도 포항시 영일읍) 출신이다. 증조부는 정균지(鄭均之), 조부는 정윤(鄭潤), 아버지는 정유(鄭侑)이다. 어머니 채씨(蔡氏)는 채유길(蔡惟吉)의 딸이며 경원군부인(慶原郡夫人)에 봉해졌다.
생애 및 활동사항 / 1347년(충목왕 3)에 대언(代言)으로 정방 제조(政房提調)가 되었으며, 1348년에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주관하여 시와 부를 시험하여 박형(朴形) 등 52명과 10운 시를 시험하여 김득제(金得齊) 등 46명을 선발하였다. 또한 1361년(공민왕 10) 제2차 홍건적 침입이 있었을 때, 전직 밀직제학으로서 김규(金㺩)와 함께 절령책(岊嶺柵)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적의 공격을 받아 후퇴하였다. 1365년에는 경상도순문사에 임명되어 합포(合浦: 마산)에 있었는데, 마침 최영(崔瑩)이 신돈(辛旽)의 참소를 입고 동서강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에서 계림윤(鷄林尹)으로 전보되어 경주에 오게 되었다. 왕의 조처에 불만을 가진 신돈이 다시 일을 꾸며 보고하고 당류(黨類) 이득림(李得霖)을 경주에 보내어 최영을 사죄(死罪)로 엮어 죽이려고 하자, 이에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하다가 파면되었다. 그 뒤 1368년에는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있는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영전(影殿)이 협소하다고 하여 마암(馬巖)으로 옮겨 짓도록 하였다. 이때에 정사도는 첨서밀직(僉書密直)으로 있었는데, 첨의시중(僉議侍中) 유탁(柳濯)의 제안에 따라 동지밀직(同知密直) 안극인(安克仁)과 함께 영전을 옮겨 짓는 일은 백성을 괴롭히고 재물을 낭비하는 것이므로 이 역사를 중지할 것을 건의하다가 왕의 비위를 건드려 순군옥에 일시 갇혔다가 곧 석방되었다. 1371년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밀직사의 지사)로 승진되어 명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갔다왔으며, 1375년(우왕 1)에는 당시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을 죽이려 하였다고 의심받아 정몽주(鄭夢周) · 김구용(金九容) · 이숭인(李崇仁) · 임효선(林孝先) · 염정수(廉廷秀) · 염흥방(廉興邦) · 박형(朴形) · 이성림(李成林) · 윤호(尹虎) · 최을의(崔乙義) · 조문신(趙文信)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1379년 향년 62세로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정보(鄭保) 호는 운곡(雲谷), 설곡(雪谷)
정보(鄭保, ? ~ ?)는 조선시대 초기의 문신, 정치인이다. 1456년(세조 2년) 6월에 단종 복위 사건이 일어나자, 인척 되는 한명회(韓明澮)에게 사육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사육신을 죽이지 말 것을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천추의 악인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한명회가 그해 12월 그를 난언죄(亂言罪)로 고발하여 죽음을 받게 하였으나, 세조는 그가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의 손자임을 감안하여 죄질을 한 등급 감하여 연일(延日)에 유배된다. 고려후기의 문신인 정몽주의 손자이며 정종성(鄭宗城)의 아들이다. 호는 운곡(雲谷) 또는 설곡(雪谷), 본관은 영일(迎日). 그의 서누이동생 정씨는 한명회의 소실이 되었다.
생애 /출생과 가계 / 운곡 정보는 고려 말의 학자이자 충신인 포은 정몽주의 손자이자 이조참의 정종성의 아들로 태어났다. 1392년 할아버지 정몽주는 이방원의 정변을 반대하고 이성계와 조준, 정도전 등의 역성혁명파를 제거하려다가 살해된다. 그러나 이성계나 이방원은 그에게 연좌제를 가하지 않는다. 아버지 정종성은 다시 늙으막에 첩에게서 서녀(庶女) 한 명을 보았는데, 이 서녀는 후일 한명회의 첩이 된다.
생애 초반 / 정보는 학문이 뛰어나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한때 예안현감으로 나갔다가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일찍이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친교를 맺고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다. 할아버지 정몽주의 제자는 길재, 이숭인, 권우 등으로 권우는 후에 세종대왕의 스승이 되었고, 길재는 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태두를 형성하였다. 따라서 조부의 제자인 권우의 제자였던 세종대왕은 그를 각별히 총애하였다. 이후 관직에 올라 예안 현감(禮安縣監)을 역임했다.
세조 규탄과 사망 / 나이 60이 넘어 사헌부 감찰이 되었고, 세조 즉위후 1456년 6월 단종복위사건이 일어나자, 서 매제인 한명회(韓明澮)를 찾아가 사육신의 무죄를 주장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천추의 악인이라며 규탄하였다. 정보는 한명회를 찾아가 사육신을 죽이지 말 것을 요청했고, 그들을 죽인다면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한명회는 그의 요청을 거절했고, 그는 천추의 악인이라며 규탄하고 나왔다. 그해 12월 한명회가 그를 난언죄(亂言罪)로 고발하여 죽음을 받게 하였다. 그는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에는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을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서 매제인 한명회의 고발로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단종 복위를 꾀한 성삼문, 박팽년을 변호하여 세조가 직접 신문할 때에 “일찍이 성삼문.박팽년 등을 정인군자(正人君子)라고 했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말을 하였다.”라고 하여 환열(轘裂)을 명하였다가, 세조는 그가 고려 충신 정몽주의 손자임을 감안하여 정상을 참작, 죄질을 한 등급 감하여 감형, 연일(延日)에 유배시켰다. 그리고 가산을 적몰하는 것으로 종결하였다. 그 뒤 양사의 진언으로 단성 문태 촌으로 이배되었다가, 그 곳에서 간사한 무리들의 참소로 누명을 쓰고 단성 배소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정확한 그의 나이는 알 수 없으나 고령의 나이에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후 / 숙종 25년(1699년) 당시 지경연사(知經筵事) 이유(李濡) 등의 상소로 신원(伸寃)되었고, 증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후일 정조는 그를 두고 '죽지 않은 사육신'으로 평가하였다. 1905년(광무 9년)에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경기도 용인의 충렬서원(忠烈書院)에 제향 되었다. 경기도 용인군의 충렬서원(忠烈書院)에 제향 되었으나 흥선대원군 섭정 때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헐렸다. 1982년 공주 동학사의 숙모 전에도 배향되었다.
가계 / 증조부 : 정운관 / 할아버지 : 정몽주(鄭夢周, 호는 포은, 1337년 ~ 1392년 음력 4월 4일) / 숙부 정종본(鄭宗本) /서숙 정종화 / 아버지 : 정종성(鄭宗城, 1374년 - 1442년)
어머니 : / 누이 : 오천군부인 연일 정씨 / 子女 男 : 3  女 : 6  //    <끝>
♥설곡 정보는 단종 조의 충신으로 정조로부터 “살아 있는 사육신”이라는 평까지 받은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의 사적이 일실되어 별반 주목되지 못하였다. 그의 사적을 변증하기 위하여 ≪설곡선생실기≫,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등 여러 문헌을 바탕으로 정보의 출생지와 시기, 참화사건, 단성 유배와 졸년 시기, 묘소, 사후 신원과 배향 등을 추정한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정보는 생몰연대조차 기록이 없으나 여러 문헌을 살핀 결과 정보의 졸년은 1460년(세조5, 경진) 쯤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정보의 졸년을 근거로 출생 연도를 환산하면 포은의 순절 이전 개성에서 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건국 이후 정보가 거주하였던 곳은 중부 견평방이었다. 정보는 포은의 유학(儒學)을 가통으로 전해온 가학을 전수하였으며, 성품이 올곧고, 구속받기를 싫어하였다는 평을 받는다. 절친하였던 인물이 성삼문・ 박팽년이라는 사실에서도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그를 평하는 말로 ‘방랑불기(放浪不羈)’, ‘강의(剛毅)’, ‘당직(戇直)’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정보는 세종 때 사마시에 급제하여 문종 즉위년인 1450년에 사헌부 감찰로 재임하였으며, 이후 6-7개월간 외직인 예안현감에 재임하다가 퇴직하였다. 정보는 포은의 손자이기에 세종 때부터 각별한 시혜를 받았다. 왕실과 통혼할 정도로 영일정씨 가문에서 가장 전성기를 이룬 시기에 활동하였다. 그러나 사육신의 옥사를 계기로 정보의 일가는 일대 전환점을 맞았다. 정보는 성삼문・ 박팽년을 정인군자로 옹호하는 발언을 하여 세조의 친국을 받았다. 이 당시 정보의 나이는 70을 넘은 때이다. 환형(轘刑)에 처해졌다가 포은의 손자라는 사실 때문에 죽음을 면하여 영일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단성 문태 촌으로 이배되었다. 정보의 참화는 그의 가산을 적몰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일가친척들이 모두 역률에 연좌되어 처벌되었다. 정보의 묘소는 1460년(세조5) 무렵 졸서하여 단성의 문태 산기슭에 가매장 하였다가 이후 포은선생의 묘소 아래 반장(返葬)하였을 가능성이 짙다. 정보는 단종이 복위되고, 사육신이 포숭 된 이후 1703년(숙종29)에 신원되고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1791년(정조15)에 충렬서원과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 1736년(영조12) 영월 유생이 상소하여 팔현사 현판을 청할 때 정보 또한 팔 현의 한 사람으로 배향되었다. 근대시기에 이르러 이건하, 남정철 등의 노력으로 1906년(광무10)에는 정2품 자헌대부 내부대신에 추증되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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