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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송천
ㆍ작성일 2026-08-03 (월)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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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 ● 영일정씨 단밀 가문의 다섯 효자 이야기 ●
                                 3번    ● 영일정씨 단밀 가문의 다섯 효자 이야기 ●
                                                                                                       송천松泉 김영동金永東
이 글은 한 가문家門에 4대四代 ①를 이어 다섯 효자가 난 우리군 관내 단북, 단밀 일대에 세거世居하는 영일정씨 迎日鄭氏 초산공 樵山公 문중門中의 효행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선조先祖는 고려 말의 포은선생 圃隱先生의 파조派祖이며 손자인 설곡공 雪谷公 정보鄭保 ②가 있는데. 설곡공은 세조世祖때 국문鞠問을 당하면서도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같은 사육신死六臣들을 정의正義의 ‘군자’라고 대왕전大王前에서 태연하게 면박직언面駁直言③ 하여 세조世祖가 대노大怒했지마는 충신忠臣의 후손이라  환형轘刑 ④(거열형車裂刑)을 거두고 단성현(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일대)에 유배流配되어 적소謫所 ⑤에서 졸卒하여 영월 寧越의 팔현사八賢詞와 동학사東鶴寺의 숙모 전(肅殿)에 배향配享되었다. 설곡공은 기품氣稟있는 현조顯祖로 가문 내 후손들의 자긍심이 대단하다. 영일정씨 시조는 고려 의종조毅宗朝의 추밀원樞密院 지주사知奏事 ⑥인 형양선생滎陽先生 습명襲明 ⑦으로 묘소는 실전失傳되었으나, 포항시 대송면 남성리에 단소壇所, 남성재南城齎 재실齋室 등이 있다. 중조中祖는 고려 말에 개성 선죽교善竹橋에서 순절殉節하신 포은선생圃隱先生 몽주夢周이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 리에 있으며, 묘 아래에 충렬서원忠烈書院과, 포은종택圃隱宗宅이 있다.  포은선생은 영일정씨 전국 여덟 문파 중 제1파 第一派의 파조派祖이며, 세상에서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요 만고萬古의 충신忠臣으로 추앙推仰 받는 현조賢祖이다. 단밀 입 향조는  효자孝子 월봉공月峯公 정악 鄭岳 ⑧ 이다. 월봉공의 아버지는 초산공樵山公 정전섬鄭全暹으로 4대를 내려가며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효자로 일컬어지는 다섯 명을 배출하여 단밀은 효자가 많이 나는 고장이라고 할만하다.
첫째 조선 英祖 갑신년甲申年(1764)에 봉성서당鳳城書堂 ⑨ 유생들이 조정에 상신上申한 정문呈文에 전섬全暹은 천부적인 성품으로 어머니를 받들어 모시기를 의복은 가볍고 따뜻하게, 음식은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정이 넘치는 얼굴빛을 하고 뜻을 순하게 받아들여 어기지 않으니, 원근에 사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말하기를 “ 부모를 섬기는데 있어서는 마땅히 전섬과 같이 행한 연후에라야 가히 자식으로 도리를 다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그 어머니가 세상을 마칠 때까지 효도를 다하지 못하고, 그만 병이 들어서 일찍 죽고 말았는데, 임종에 다다르자,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나는 지금 세상을 떠나야 하니, 네가 할머니를 잘 받들어 모셔서 배가 고프지 않고, 추위를 느끼지 않도록 옷을 입혀 모시면 내가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초산공에게는 통훈대부通訓大父 호조좌랑戶曹佐郞의 증직贈職이 내려졌다.  둘째로 아들 악岳은 호가 월봉月峯으로 아버지의 임종시에 단지斷指 ⑩해서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얼마 동안을 소생 하였다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를 섬김에 아버지의 유언遺言대로 식사 때에는 할머니와 동반겸상同盤兼床으로 차려서 언제나 할머니가 식음食飮을 받들고 난 뒤에 남긴 뒤에 남긴 음식으로 식사를 하는 등 삼십여 년을 하루같이 받들어서 백수百壽를 누리게 하고 돌아가시자, 슬프고 애통한 심정으로 여묘廬墓살이를 했으니, 그 효행이 높고 특수한 가치가 실로 고금에 드문 일이라 이가 발천發闡 ⑪ 되어 상신上申이 조정朝廷에 전달되어 정여문旌閭門 ⑫이 세워졌고,  효자孝子로 천거薦擧되어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 童蒙敎官 ⑬의 제서除書 ⑭가 내려졌다. 월봉공 효행의 예를 들면 할머니께 어육魚肉과 건조한 포류脯類는 반드시 두드리고 씹고 해서 부드럽게 하여 드시게 하고, 항상 어린아이들이 장난치며 노는 모습을 흉내를 내 즐겁게 해드리고, 때로는 밖에 나가시고 싶다고 하시면 가는 곳을 여쭈어 모시고 나갔다. 또한,  대소변도 자력으로 하시지 못해 의복을 더럽히더라도 가인 家人의 손에 맡기지 않고 한결같이 손수 세탁하여 입히는 등 자모慈母가 강보襁褓에 쌓인 어린 아기를 거두듯이 함을 거의 삼십여 년에 이르렀다. 월봉공이 밖에 나갔다가 음식물을 취하게 되면 반드시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와서 할머니께 올렸다. 이로 인하여 공이 외출했다가 귀가하면 할머니는 공의 소매 속에 손을 넣어 뒤지는 게 생활화 되었다. 셋째 악岳의 아들 순도順道는 효성이 천성적으로 지극하여 어머니가 종기腫氣가 나서 고통苦痛이 심하자 입으로 빨아서 완치하게 하였고, 큰아버지를 아버지 섬기듯이 하여 여러 종형제들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살며, 그 족의族誼가 매우 아름다워 남들이 그 사이를 이간질 할 수 없었다. 넷째 악岳의 아들 순도順道와 순기順紀 형제는 아버지가 여묘廬墓살이 할 때, 나이가 겨우 12세와 9세로 밤에는 꼭 아버지의 여막廬幕 ⑮★에 가서 모시고 함께 자면서 묘소를 지키니, 대호大虎 ★도 밤마다 여막 앞에 와서 함께 지냈으나, 조금도 두려운 바가 없었다. 낮이면 아버지의 상신喪身을 섬기며, 땔나무를 해오고 밭에 김을 매어 아버지로 하여금 평안한 마음으로 시묘侍墓살이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아버지가 임종에 다다르자, 단지斷指하여서 소생하시기를 빌었다. 다섯째 월봉공 악岳의 손자인 학채學采와 순언順彦의 아들 장손長孫은 나이 겨우 1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성장하여 남의 집 어르신만 보아도 그만 아버지가 그리워 눈물을 짓고,  어머니를 좌우에서 봉양함이 지극하였다. 이처럼 정성을 다 하여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 등 삼세三世의 이력을 세상에 널리 발천拔薦하기 위하여 두루두루 당세當世의 명성 높은 선비들을 찾아다니며, 신원伸寃하여 학채學采는  포상 襃賞을 받았다. 고종7년(1870) 경오년庚午年에 경상감사慶尙監司 이삼현李參鉉 ◆이 그 효자 3대의 행적을 조정朝廷에 장계狀啓를 올려 증조할아버지는 호조좌랑戶曹佐郞, 할아버지 악岳은 동몽교관童蒙敎官이 증직贈職되고, 손자는 포상을 받는데, 그쳤으나  3대가 증직贈職과 포상을 받았다. //


① 4대四代 :고조부모까지의 조상을 뜻한다.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의 4단계를 이르는 말이다
② 정보 鄭保 : 생몰년 미상,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영일迎日 호는 설곡雪谷, 할아버지는 몽주夢周이며, 아버지는 이조참의 종성宗城이다. 학문이 뛰어나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한때 예안현감으로 나갔다가 감찰이 되었다. 일찍이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친교를 맺고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다.
③ 면박직언 面駁直言 : 얼굴을 마주하여 꾸짖거나 바르다고 생각되는 바를 기탄없이 말함.
④ 환형 轘刑 : 옛날, 극형極刑의 하나로 두 발을 각각各各 다른 수레에 매고 수레를 끌어서 죄인罪人을 찢어 죽이던 형벌刑罰.
⑤ 적소謫所 : 죄인罪人이 귀양살이하는 곳.
⑥ 지주사 知奏事 : 고려시대 중추원의 속아문인 승지방承旨房의 정3품 장관직, 승지방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부서
⑦ 습명 襲明 : 생몰년 미상. 고려전기에 예부시랑, 한림학사, 추밀원 지주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영일迎日이고, 호는 형양 滎陽이다. 아버지는 정후감 鄭侯鑑으로 부호장 副戶長을 지냈다. 주로 간관 직을 맡아보았던 정습명鄭襲明은 왕실의 사부로서 의종을 훈육하고 보필하는데 사명을 다하였다.
⑧ 정악 鄭岳(1779~?) : 조선 후기 의성출신의 효자로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복여 福汝, 호는 월봉月峯, 포은 圃隱 정몽주 鄭夢周의 후예로 아버지는 정전섬 鄭全暹이다. 12살 아버지가 위독하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마시게 하는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오래 살지 못하고 할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에 아버지는 자신이 못다 한 자식으로 해야 할 도리를 아들에게 부탁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유명 遺命을 받들어 할머니를 모시는 데 정성을 다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승중손 承重孫으로 3년간 시묘를 하였는데 저녁마다 호랑이가 와서 그를 지켜주었다. 정악의 이러한 효심에 감화된 어린 두 아들은 날씨에 구애되지 않고 해가 질 때면 묘소에 와 아버지와 함께 자고 아침이 되면 귀가하였다.
⑨ 봉성서당 鳳城書堂 :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주선리 注仙里에 있던 서당이다. 1706년(숙종32)에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712년(숙종38)에 신복성 申福誠, 신유진 申柳珍, 조초은趙樵隱, 구미리 丘美履 등이 재건하였다. 1743년(영조19)에 북 남쪽으로 옮겨지었으나, 후에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겼다. 속수서당 涑水書堂의 건립으로 명칭이 중복되는 것을 고려해 현재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⑩ 단지 斷指 : 부모父母난 남편男便의 병病이 위중危重한 때에 제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먹게 하는 일.
⑪ 발천 發闡 : 쌓이거나 가려져 있던 것이 열리어 드러남.
⑫ 정여문 旌閭門 : 효자, 효부, 열녀, 충신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나 문.
⑬ 동몽교관 童蒙敎官 : 조선시대 서울의 사학四學과 각 지방에서 학동들을 가르치던 종9품의 관직.
⑭ 제서 除書 : 벼슬을 제수除授 할 때 전조銓曹에서 임명된 관리의 명단을 적은 문안文案이나 사령장辭令狀.
⑮ 여막 廬幕 : 무덤가에 지은 초가草家로 상제喪制가 상이 끝날 때까지 거처居處하는 곳.
★ 대호 大虎 : 큰 호랑이.
◆ 이삼현 李參鉉(1807~ ) : 본관 용인 龍仁, 자 태경台卿 호 종산鐘山, 1834년(순조34) 삼마 시 司馬試를 거쳐 1841년(헌종7) 정시문과 庭試文科에 병과 丙科로 급제하여 홍문과 제학 弘文館 提學을 거쳐 1850년(철종1) 평안도 암행어사가 되었다. 1855년 좌승지左承旨로 있을 때 대사헌 이경재李經在와의 논쟁으로 삭직되었다. 뒤에 다시 기용되어 1862년 전국에 민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선무사宣撫使, 함흥부안핵사 咸興府按覈使 등으로 나가 민심을 수습하고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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